[황망한소개팅][황망한연애담]
목록  |  이전글  |  다음글

[황망한연애담] 수치심

2014.10.1 11:46
안녕하세요 30대 중후반의 형제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는 이미 수개월 전 종지부를 찍어버린 깨빡 연애담이지만, 문득문득 떠올라 심장을 콕콕 쑤시는 상처이기도 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고 나면 연애에 있어서 무덤덤해지고 좀 덜 아플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은 또 아닌가봅니다. 가을바람이 참 차네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주변으로부터 넉살 좋고 털털하다

평가를 받는... (조금은 준수한 얼굴을 가진)

케이블 방송사의 PD입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가 매달리는 연애, 여자가 매달렸던 연애,

가벼운 연애, 진지한 연애 등등등

을 거치며 나름의 가치관도 세웠었고

 

여자들에게 대시하는 요령, 연애의 기술..

이런 것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

고 살고 있었죠.

 

 

이렇게 믿고 살던 제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작년 말이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 그 사람은

대기업의 법무팀에서 일하는 소위 엘리트였죠.

사법연수원 졸업 후 일반기업에 취업한 케이스..

 

소개팅 자리에서 만나본 그녀는

얼굴, 몸매가 빼어나게 예쁘지는 않았지만

 

새초롬한 눈빛, 왠지 슬퍼보이는 듯한 눈빛,

조심스러운 듯 알 수 없는 분위기,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뭐라 설명은 힘든데; 간단히는

강아지보다 고양이과의 그런 여자였습니다.

 

저는 워낙 천성이 외향적이고

주변에 거친 남자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 신비롭고 여성스러운 분위기

특히 약한 성향을 보이는 남자..

 

엄청난 호기심과 호감이 일었고,

제 적극적인 대시로 얼마 안 가 사귀게 됐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근이 잦은 그녀를 찾아가 야식을 챙겨먹이고

격무에 시달리는 그녀를 자주 볼 수 없었기에

주말이면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등등

상세한 계획을 세워 차로 모셨습니다.

 

정말 이전의 어떤 연애에서도

이정도의 정성은 들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3개월을 열렬히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급속도로 그 사람에게 빠졌던 건지는..

 

흠.... 

전에 없이 빠졌던 게 문제였을까요,

이런 제 마음이 너무 앞서나갔던 걸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좋은 면’에 눈이 멀었던 걸까요.

(뭐가 답이든 뭔 상관이겠냐만은..)

 

저는 그 사람이 변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는 작은 실내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녀가 이러더군요.

 

“얼마 전에 전남친을 만났는데

오빠 쪽팔려서 어떻게 만나냐고 하더라.

자기 차버리고 만난다는 사람이

고작 케이블 방송 PD냐고..”

 

................

.....................................................

그녀는 사법연수원에 있을 당시 동기와 연애를 한 바 있고,

지금은 그 사람과 헤어졌지만

여전히 연락은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검사라고 하네요..

 

그런데 저도 참 ㅂㅅ이지요..

그 소리를 들은 당시에는 그녀가 밉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전할 수가?’

 

가 아니라,

 

‘아니, 지까짓 게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쥐뿔 이쪽 바닥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 게, 어?

남의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울컥 치밀어오른 화를 주체 못하고

주변 테이블에서 모두 쳐다볼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XX 전화번호 대, 뭐야 그 시건방진 XX는?”

 

라고 따져물었고,

 

 

그 사람은 당황한 듯 저를 말려서 도로 앉혔습니다.

 

저는요,

대학 시절부터 방송 제작에 흥미를 가지고

계속해서 관련 활동들을 쉬지 않고 해왔고,

소위 언론고시라는 루트를 제대로 밟은 사람입니다.

 

사시를 본 사람들만큼은 못 될지 몰라도,

씹어먹을 때까지 읽고 읽고 줄 긋고 박박 그어대며

공부했던 두꺼운 상식책들..

 

10권에 가까운 노트를 가득 채웠던 논술, 작문 글들..

 

이런 제 노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비록 공중파 방송국에 들어가진 못 했어도,

저희 회사, 케이블에서 손꼽히는 곳입니다.

제 나름의 애착이 있다는 뜻...

 

그리고 어디 가서 직업으로 무시당한 적은 없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났습니다.

 

당시 제가 워낙 크게 화를 냈었기 때문에

그 사람 입에서 다시 전남친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나름 조용한.. 몇 주를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또 어느 시점에 가자,

그녀는 저와의 약속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정말 비참한 것이..

저와의 사소한 약속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서

‘아, 내가 이 사람에게 이 정도의 무게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이트 약속 당일에 취소하기는 뭐 부지기수였고..

 

이 일이 대박이었죠..

그 사람이 주말에도 출근해야 한다길래,

제가 “토요일 오전에 집 앞으로 태우러 가겠다”

했습니다.

 

그녀는 “알겠다” 했고 전 당일 8시쯤 까톡을 했죠.

[준비 다 됐냐, 가면 되냐] 등등..

 

그런데 한 5개를 보냈는데 답이 없는 겁니다?

전화도 했죠.

한 ,

두 통,

세 통................

 

그런데도 이 멍청이는 또 분노를 하지 못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너무나 걱정이 됐어요.

 

결국 그 사람 집까지 가서 전화를 10통 정도 했고

문을 두들기고 소리 지르고 ;;;

경찰에까지 신고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까톡”

.

 

.

 

.

 

 

[지금 회의 중이야 왜 이렇게 전화를 해]

 

 

.............................

이런 까톡이 왔죠...............

하....................................................

 

[내가 아침에 바래다주기로 했잖아]

 

[새벽에 갑자기 콜이 와서 급하게 나왔어]

 

[그래도 만나기로 했으면 연락을 줘야 할 것 아냐?]

 

뭐 이런.....................

뻔한 대화를 했습니다. 너무나... 어이없고.....

 

맥이 탁! 풀리는 기분?

 

그렇게 꿀렁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내다..

저는 결국 못 참고 잠시 보자고 했죠.

 

그랬더니 야근을 한답니다..

해서, 저는 회사 앞으로 찾아갔습니다.

 

억지로 불러낸 그 사람, 한다는 말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이게 이더군요.

 

전.. 이제까지 뭘 한 걸까요?ㅋ......................

제가 그렇게 바보천치등ㅅ도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까지 내동댕이쳐지니.. 당황스러울 뿐.....

솔직히 그 사람에게서 당한 모든 것에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사실은요, 저는요..

사랑이라는 것이 꼭 보상이 있어야만 성립 가능하다

고 생각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제가 누군가가 상대를 위해서 퍼주기만 해도 행복하다면

그것 또한 사랑의 한 종류, 한 모습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 좋고,

그에게 베푸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이렇게 씁쓸하네요..ㅎ

제가 그 사람에게 뭐였나 싶다보니....

제 연애에 대한 생각도 통째로 흔들리더군요..

 

이제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제가 사랑하는 방식이 맞는 건지 확신도 없고

 

(그 사람 제외하고는 (비록 차여도 봤지만)

그다지 스스로의 연애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냥 막 다......... 허무하고.. 그렇습니다.

 

모두들, 이번 겨울 대비는 잘 하고 계신지요..

(쌩뚱 마무리)

 

목록  |  이전글  |  다음글

댓글쓰기

46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댓글쓰기

황망한 이야기

2014/10/05 [][감친밥] 고발합니다
2014/10/04 [][감춘문예 출품작] 가끔 미치도록 네가 보고싶어
2014/10/03 [황망한연애담] 버스커, 버스커!
2014/10/02 [][감춘문예 출품작]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2014/10/02 [][회람] 화장품 노나쓰기 위해 진행하는 리뷰이벤트
2014/10/02 [황망한연애담] 친오빠가 준 똥
2014/10/01 [][감춘문예 출품작] 지방의 난 놈
2014/10/01 [황망한연애담] 수치심
2014/09/30 [][감춘문예 출품작] 아름다운 것들은 변한다
2014/09/30 [황망한연애담] 다이아만 아니었다면
2014/09/29 [][감춘문예 출품작] 그놈의 대학생 타령
2014/09/29 [황망한연애담] 난 24살이 되었는데
2014/09/28 [][감춘문예 출품작] 싫다, 경기유발자
2014/09/28 [황망한연애담] 천하의 C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