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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연애담] 곧잘 베풀던 '호의'

2014.12.22 15:41
안녕하세요. 전 방년 35세의 아직 미혼인 여성입니다. 며칠 전 취미 생활을 하다 갑자기 옛 기억이 스물스물 올라오면서, 문득 형제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겨 이렇게 메모장을 펼쳤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철벽녀가 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주었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이야기 진행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전 외향적인 성향은 아닙니다.
오히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입니다.
리더십은 없지만 서포트는 좀 잘 하고요..


그리고 직업은 간호사 10년차.
간호대학을 나온 뒤 성격에도 잘 맞아
큰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된, 천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 3년차쯤 되었을 때,
병원 편의점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게 됩니다.


대학 시절 갔던 농활 뒤풀이에서 잠시 인사했던,
푸근하고 인상 좋은 늦깎이 유부남 선배였어요.


그 사람은 본인의 학교 병원이 아닌 타 병원에
전공의로 오게 되었고, 혈혈단신 타지 생활에
외로워하던 차에 절 만났던 겁니다.


저도 마침 선배가 졸업한 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 터라, 이래저래 공통점도 있었고
옛날 기억도 떠올리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잠시 병원 얘기를 좀 하자면,
종합병원은 환자를 살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불륜과 치정의 공간이기도 합니다....-_-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가 떠오르네요..)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남녀가 함께 밤을 새우고
꾀죄죄한 꼴 보며 같이 어려움을 넘기다 보니
정들기 쉬운 환경이긴 해요.


모든 병원이 스캔들의 온상은 아니지만,
근무 특성상 온갖 스캔들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
병원에선 말조심, 행동조심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엔 늘 위축되어 있었고요.


(“당직실에 누가 들락거린다더라,
누구와 누가 어디서 나오는 걸 봤다더라”
이런 소문에 휘말리면 정말 골치 아프거든요..)


근데 이 선배는 제가 너무 반가웠던지
식당에서, 로비에서, 병동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기만 하면 그 성량 풍부한 목소리로 아주 크게,


“어이~~ ㅇㅇ이~~~ 잘 지내나??
뒷모습이 전지현이랑 완전 똑같아서(연예인 드립이 취미;)
누군가 했네 허허허허허허 술 한 잔 해야지? 허허”


이러고 자기는 사라지길 몇 번..-_-;;;;
(뭐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ㅠㅠㅠ)


어느새 병원엔 저랑 이 분이
아주 친한 사이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이 선배도 저도 평소 흠 잡힐 행동은 안 했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굳이 특기할 만한 일을 뒤져본다면
둘이서 대화한 적은 몇 번 있었는데..


당시 전 교대근무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니느라,


학교 갔다 와서 밤 근무
퇴근하고 한 시간 자고 다시 학교
2시간 자고 또 밤 근무 
어쩌다 오프날엔 숙제


의 루프를 반복하면서 스트레스게이지
극한으로 치달았었고


이 선배는 전공의 생활을 하며
스텝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분노게이지가 충만한 상태여서


둘이서 맥주 마시며 서로의 ‘갑’을 까며;
수다 떨었던 적이 두어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절대, 네버,
분홍빛의 야시꼬리한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주제는 늘 의사가 생각하는 간호사,
간호사가 생각하는 의사, 현재 의료체계의 문제점,
저희 교수님, 수간호사 뒷담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정답게 뒷담을 나누며..
얇고도 근근한 연을 이어가던 중
어느덧 2년이 지나갔고,
이 선배는 전문의 시험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전 그때 즈음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컴퓨터 앞에 빈사 상태로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습관처럼 반복해서 들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피아노 연주곡을 틀어놓고 논문을 쓰고 있었읍죠.


그리고 제가 워낙에 물건이든 음식이든 좋은 게 있으면
주위 친구들한테 선물하는 걸 좋아해서
그날도 친구들에게 주려고 CD를 2개 샀다가
이 선배도 시험 격려차 주면 좋을 것 같아
하나 더 사서 줬습니다
. 엄청 좋아하더라구요.


그러다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선배는
서울로 봉직의의 길을 가기로 했고


서울로 떠나기 전, 밥이나 먹자고 해서
낮 근무를 마친 어느 날 5시부터
쭈삼에 소주를 먹었습니다
.


180cm가 넘는 거구에 근육덩어리의 이 사람은
소주를 몇 병을 마셔도 끄떡없겠지만...


낮 근무 후 미칠 듯이 쏟아지는 졸음
+ 근육이라곤 횡격막과 종아리 근육이 전부
저는 소주 3잔 연속에 하늘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결국 화장실에서 실신한 후
오후 6시에 그 사람에게 질질 끌려나왔습니다.


이 분은 결국 절 비디오방에 투척;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누워있으니 이 선배가 자꾸
저를 한 팔로 안아서 자기 어깨에 기대어
포옹하듯이 자세를 잡더군요
.


그래서 저는 그 정신에도 ‘이 사람은 유부남이다’
라는 걸 기억해내며 “울렁거린다”는 핑계를 대면서
벌떡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선배는 이러다 자기 안 되겠다며(..무엇이?)
먼저 가버리고;;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던
전 실신을 해서 2시간을 자다가
주인 아주머니가 깨워서 겨우 나왔어요 ㅠㅠㅠㅠㅠㅠ


다음 날 [속은 괜찮냐] 뭐 그런 문자가 몇 번 오갔고,
선배는 서울로 갔습니다.

그 후 1년 뒤, 저도 서울로 직장을 옮기기 위해
면접을 보게 되었고, 선배와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잠시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1차에서 이 분은 술이 살짝 오르셨는지,
자꾸만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가자고 해요.
DVD 방으로요..........-_-


전 그건 안 된다 하고 그냥 술 한 잔 더 하자고
겨우 설득해서 양주를 마시러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가 독한 술 단 두 잔에
어지럼증을 느꼈고, 선배가 끊임없이 영화 드립을 해대서
제가 먼저 집에 가겠다고 하고는 결국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혼자 택시 다고 가겠다고 하니
끝까~지 자기 차로 태워주겠다고 옆에 무작정 타는데
막지도 못 했습니다ㅠ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서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귓속말로 이럽니다.


“내가 널 5년만 빨리 만났어도 좋았을 텐데..”


라고요.. 어이없어서 제가 그랬어요.


“애가 둘 있고 가정도 있는 사람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랬더니 “와이프랑은 어쩔 수 없이 산다.
서울에 와서 전화 안 한 지도 오래고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러면서 자꾸 옆에 들러붙더군요.
그때 저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고


“병원에서 염문설 뿌리는 흔한 의사들하고
선배도 하나도 다른 거 없군요. 실망입니다.”


라고 말한 뒤 동생에게 전화를 했어요.
어지러워서 갈 수가 없으니 나오라구요.


그렇게 택시에서 겨우 내렸고,
내리자마자 전 속에 있는 걸 다 게워내면서 빌빌댔고
이 선배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
동생이 와서 절 데려갔습니다.


다음 날 문자가 왔는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기억이 안 난다]
고 연락이 왔습니다....-_-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못하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문자도 씹고 전화번호도 지웠어요
.


전 그날 이후.. 속상하고 화가 나는 기분을 추스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뭐가 잘 못되었던 건지..?
하고 말이지요.


유부남에게 잘 대해준 게 빌미를 주었던 것인지,
몇 번 만나 재밌게 이야기하고 놀았던 게 쉽게 보였던 건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술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데 술에 의해 드러난 것인지
..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전 소주를 잘 마시지 않게 되었고
곧잘 베풀던 호의도 남자에겐 절대 베풀지 않았습니다.


호의에 담긴 제 마음이 상대에게 확대해석되는 게 두려워서요.
제 의도와 관계없는 스캔들에 휘말릴까봐요.


그리고 이 패턴이 한 해 두 해 반복되다 보니
이젠 남자들에게 호의를 어떻게 베풀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고목이 되어가는 기분...


이제는 형제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자분들이 형제분들에게 베푸는
호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호의를 베푸는 여자를 보면 
‘아 저 여자는 꼬시면 넘어오겠구나’
싶으신가요..?


그리고 그렇다면,
단순한 호의로 생각되는 행동의 선은 어디까지인가요.


이러다 피해의식만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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