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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소개팅] 감사하는 하루

2012.03.15 15:04


안녕하세요.

매일 열심히 정독하면서 나 정도면 꿀리지 않고 제보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멘탈 헝크러지는 일을 겪고 본격 제보메일 드립니다.



제보 시작 전에 저를 간략히 소개를 드리자면

스물열살의 처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번듯한 직장 다니고 있으며

그간 다른 어떤 일도, 최고로 잘하진 않더라도

중간 정도는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연애에 있어서만은 항상 찌질하기 그지없네요.

공부가 연애보다 쉬웠어요.’ 랄까요. ㅠㅠ

 

연애부진아의 역사는

대학교 입학 무렵부터 만났던 남자친구와의

5년 연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래 만났던 동갑의 그 남자친구는

조승우를 쏙 빼닮은 눈에 띄는 미남이었습니다.

CC의 로망을 얘기하는 족족 실현시켜주는데다가

입만 열면 줄줄줄 박학다식함이 흘러나오고

살짝 시니컬했던 그 사람은,

스무살 무렵. 어리고 미욱한 제 마음을

홀랑 흔들기에 매우 충분했습니다.

 

한때는 우린 천생연분이다 라며 굳게 믿던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몇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 중 한가지는 제 취미를 부르주아지의 그것이라며

하려면 너나 해!!” 라고 매도하는 것이였죠

내 돈으로 먹는 밥, 내 배 곯아가며,

책사고 음반사고 공연장을 다니며

문화생활은 꼭 하겠다는데 항상 못마땅해했었죠.

그래서 연애를 하는 몇년간,

남자친구와 콘서트를 간다거나,

전시회를 본다거나 하는 일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였어요.

 

또 다른 문제는 그가 반반한 얼굴과 세련된 매너

강력한 무기삼아 다가오는 복수의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이였습니다.

 

뭐 결국은 그 중 한 여자와 결혼하여

처참히 저를 버리고 떠나버렸더랬지요.

 

그 뒤로 전 모두에게 공공연히 얘기했습니다.

"난 남자 외모는 필요없다.

남자의 잘생긴 외모는

나에게는 그저 치루어야 할 비용일 뿐.

나랑 말이 통하고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전 그 뒤로 몇년간,

무수한 소개팅에 등판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소개팅은 제가 지인들에게 부탁한 바와 같이,

외모나 다른 조건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너랑 말이 통할 것 같아.” 라는 멘트와 함께 주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최근에 만난 두 분을 소개합니다.

 

이 분을 부자남이라 칭하겠습니다.

제가 취업 이후,

-회사--회사를 셔틀하며

야근과 주말근무에 찌들어가고 있을 무렵.

친구자기친구회사동기라며

한번 만나보라 바람을 넣었습니다.

 

평소 회사상사분들께서

네가 소개팅을 한다면

주말 근무 땡땡이는 눈감아주겠다.”

장난반으로 하셨던 말들이 있던지라,

이때다 싶어 신나서 약속을 잡았어요.

 

직접 만난 그분의 첫인상은 키가 좀 작고 통통하고,

똥글똥글한 안경을 쓴 남자.

똘망똘망하겠구나 싶은 정도였습니다.

좋아하는 쪽으로 고르라며

파스타집또 한군데 음식점 두군데를 예약했다가

만나서 한군데로 정하는 모습은 호감이 골든벨을 울리더군요.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며 호감가던 첫인상은

모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본인이 대기업을 다니다 그만두고

유럽에 건너가 MBA를 마치고 돌아왔으며

무수한 기업에서 러브콜이 있었지만,

자신의 비전을 고려하여 지금 회사에 들어왔다는 얘기와

지금 연봉을 강조, 강조하더라구요.


, 힘든 공부 마치고 와서 뿌듯한 마음.

이해해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

유럽에서 MBA를 하며 자신이 쓴 돈

2년간 2억이 넘는다로 시작한 이야기는..

2억원의 사용처를 낱낱이 밝히는 것으로 발전되었고,

초호화 유럽여행으로 물쓰듯 돈썼던 이야기,

유럽 명문 축구클럽을 제 집 드나들듯 직관했다던 이야기..

유럽제 물건을 수집하느라 쓴 돈 이야기..

등등 끊임없이 쏟아졌습니다.

 

들을수록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돈을 펑펑 쓰고 MBA를 한 결과,

지금 자기 연봉이 전에 비해 얼마가 올랐고

그래서 본전을 뽑고 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 직종분들 저희회사에도 파견되어 일하고 있는데

일은 좀 고되죠?

편한일 하고 싶으시면 저처럼 유학다녀오세요.

2억이면 되더라고요. 하하하

 

님하 제 걱정은 고맙지만 입니다.

소개팅녀로서의 기본도리는 했다고 생각한 시간이 경과했고,

더는 듣기가 힘들어 일어서려는데 그 분이 계산서를 집어들며

씽끗웃으며 한마디 던지십니다.

 

벌이가 XX씨보다 훨씬 좋은 제가 계산할게요~”

 

.. 끝까지.. .

그래..

하긴, 너는 그 얘기 떠들어 놓고

계산안해도 욕먹었을끄야...

너 부자해라.

네가 내라.

 

이런 분은 누구와 대화가 통할까요...

급전이 필요한 아가씨라면 혹시나 싶어 환영해줄까요.. 

ㅜㅜ 

 



지난 주에 일어난 신선한 스토리입니다
.

저녁 6시 강남역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제 회사 선배친구남동생친구라는

멀고도 먼 관계의 분이었던지라

사전에 그 어떤 정보도 접하지 못한 채 만난 것이었죠.

 

만나고보니 생각보다 진지한 만남이어서,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극장 관련 업체에서 근무중이시라며,

개봉 영화를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는데,

자기 취미독서영화감상이라

직장에 매우 만족한다 라던지

재즈 페스티벌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 라던지

책을 많이 읽는다 라던지..

자기얘기를 들려주는데

약간씩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이상하게 기가 빨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분은 이렇게 얘기를 꺼냈습니다.

 

: 전 일본작가 중에 무라카미하루키를 참 좋아해서

그 사람 책은 다 읽었어요.

 

. 하루키!!!

마침 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다가

얼마전 신간을 구매하였던 터라

저도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대답했습니다.

 

: 아 그럼 혹시 상실의 시대 영화로 보셨어요?!

 

그 분은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하시다가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시더니,

 

: 아뇨. 노르웨이의 숲은 봤는데 상실의 시대는 아직이네요.

 

무라카미 하루키 취향이 아니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상실의 시대의 본래 일본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같은 책이에요.

문득, 시나몬 카푸치노를 주문해놓고

계피는 못먹는다던 어떤이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

 

 

: 이번 락페스티벌에 라디오헤드가 온다죠.

전 브리티시 락을 좋아해요..

가고 싶지만 월요일엔 출근을 해야 해서 못갈 것 같네요.

한국 가수 중에서도 역시 브리티시 락을 하는

이적이나 유희열같은 노래를 즐겨 들어요.

 

?! 이적이랑 유희열이 브리티시 락?!

파든?!

 

저의 멘탈은 헝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책읽는걸 좋아해서 전에는 책을 많이 구입했는데,

보관상의 문제로 요즘은 전자책을 보고 있어요.

 

: 아 그럼 아이패드 사용하세요?

 

: 아니요.

 

: 그럼 킨들 사용하시나봐요...? 

 

: ?! 그게 뭐죠? 전 그냥 전자책을 보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전자책을 뭘로 읽으시냐구요.

.

 
 

: 제가 지금까지 가봤던 커피전문점 중에서

삼청동의 '서울에서 두번째로 잘하는 집'에서 먹어본 게

가장 맛있었어요.

 

: ? 그집은 팥죽으로 유명한 곳 아닌가요?

저도 가봤는데..

 

: (얼굴에 당황한 기색으로) 아 삼청동이 아니고 다른곳인가봐요.

어떤 언덕 위에 있는 가게인데..

 


아...

아..

이상해...

 

: 저는 천주교인데 종교가 어떻게 되세요?

 

: 종교는 없지만 크리스마스랑 부활절에는 성당도 가봤고,

템플스테이를 해본 적도 있어요.

 

: .. 저는 다이어트를 위해 108배를 해봤는데

운동효과 말고도 심장을 땅과 가깝게 하면서

자기자신을 내려놓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효과가 있답니다.

저는 티벳에 여행을 가보고 싶어요.

거기가면 그동안 해오던 번민에서 벗어나

해탈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정색)

 

!? 뭐라구요?!

 

진지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길하는 분을 앞에 두고

전 점점 너덜너덜해져갔습니다.

뭔가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머릿속에서 조합 중인데

섬세하게 주워듣지 못한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팥죽이 유명한집 말고,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는 

"서울에서 두번째로 잘하는 집"이라는 곳을 소개해달라 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우..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소개시켜준다며... ㅜㅜ

내가 아니라 누구랑도 안 통할... 아흑...

외모는 안보고 취향이 비슷했으면 좋겠어요..’

는 왜 번번히 외모안보고까지만 접수되는 걸까요... ㅠㅠ

 

그래요..

저도 누군가에게는 소개팅 진상녀

혹은 제보를 부르는 소개팅녀였을지도 모르겠으나

한가지 확실한 건,

저도 이제 제대로 된 연애 좀 해보고 싶다는 것이네요.

포기하지는 않겠어요.

 

새삼 주변의 정상 남자들에게 감사해지는 하루였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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